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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유산관리

디지털 유산의 법적 문제: 한국과 해외의 차이

디지털 유산의 법적 문제: 한국과 해외의 차이

 

1. [한국의 현황] 디지털 유산에 대한 법적 공백과 과제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디지털 유산’에 대한 개념이 법률상 명확히 정의되어 있지 않다. 민법이나 개인정보 보호법, 정보통신망법 등 기존의 법 체계는 대부분 물리적인 재산이나 살아있는 사람의 개인정보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어, 사망 이후의 디지털 정보 상속이나 보호에 대한 명확한 조항이 없다. 이러한 법적 공백은 디지털 유산의 권리 주체가 불분명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예를 들어, 사망자의 이메일 계정이나 클라우드 저장소에 접근하려는 유족이 있다고 해도, 해당 플랫폼이 제시하는 절차에 따라 사망 증명서, 가족관계증명서 등을 제출해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개인정보 보호를 이유로 접근이 거부될 수 있다. 또한 디지털 자산으로서 실질적인 수익을 내는 유튜브, 블로그, 온라인 쇼핑몰 계정 등에 대해서도 법적으로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상속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이 미흡하다. 이로 인해 사망자의 디지털 흔적이 관리되지 못하고 방치되거나, 심지어 타인에 의해 악용되는 사례도 발생하고 있다.


2. [미국의 사례] 유언장 기반 접근과 ‘RUFADAA’ 법안

반면 미국은 디지털 유산에 대한 법적 접근이 훨씬 구체적이고 체계화되어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RUFADAA(Revised Uniform Fiduciary Access to Digital Assets Act)**다. 이 법안은 사망자 혹은 무능력자의 디지털 자산에 대해 법적으로 지정된 대리인(수탁자, 유언 집행인 등)이 합법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법은 디지털 자산 소유자가 생전에 미리 유언장이나 디지털 유산 관리 지침을 통해 특정 계정 또는 콘텐츠에 대한 권한을 위임했을 경우, 플랫폼 사업자는 법적 책임 없이 대리인의 접근을 허용할 수 있게 만든다. 이를 통해 유족은 이메일, 클라우드 저장소, SNS 계정 등 주요 디지털 자산을 법적으로 보호받으며 관리할 수 있다. 특히 구글, 페이스북, 애플 등 글로벌 플랫폼들은 이러한 법적 체계를 반영한 기능(예: 추모 계정 설정, 계정 접근 권한 위임 등)을 제공하고 있어 유족이 디지털 자산에 접근하는 데 있어 상대적으로 원활한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 미국의 사례는 디지털 유산이 단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법과 제도의 영역이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3. [유럽의 규범] 프라이버시 중심의 접근 제한과 ‘디지털 사후권’

유럽연합(EU)은 개인의 사생활 보호를 최우선으로 삼는 디지털 규제를 운영하고 있다. 대표적인 법률이 **GDPR(General Data Protection Regulation, 일반 개인정보보호법)**이다. 이 법은 생존자뿐만 아니라 사망자의 개인정보도 일정 범위 내에서 보호되어야 한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하며, 이에 따라 유족이 사망자의 계정이나 자료에 접근하는 데 엄격한 제한이 따를 수 있다.

특히 독일, 프랑스 등 일부 EU 국가에서는 사망자의 SNS 계정이나 이메일 계정에 대해 유족이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한 판례가 있지만, 이는 단순한 정보 접근이 아닌 **디지털 사후권(digital post-mortem rights)**이라는 개념 하에 제한적으로 이루어진다. 프랑스에서는 2016년부터 ‘디지털 사후 정책’을 개인이 생전에 설정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유족이나 대리인이 특정한 지침에 따라 정보에 접근하거나 삭제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사망자의 의지가 확인되지 않는 한, 플랫폼이 임의로 계정을 공개하거나 삭제하는 것은 법적으로 매우 위험한 행위로 간주된다. 유럽은 디지털 유산을 ‘보호해야 할 개인정보’로 간주하며, 정보 접근권보다는 프라이버시 보장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4. [글로벌 관점] 한국의 과제와 향후 입법 방향

세계 각국의 디지털 유산에 대한 법적 대응을 살펴보면, 한국이 현재 처한 법제도의 미비함은 분명한 문제점으로 부각된다. 디지털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는 현실에 비해, 법적 시스템은 여전히 물리적 자산 중심에 머물러 있다. 디지털 자산이 금융 자산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유산으로서도 실질적 가치와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이제는 ‘디지털 상속법’의 체계적 정비가 시급하다.

첫째, 사망자의 디지털 자산에 대한 명확한 법적 정의와 분류가 필요하다. 현재는 디지털 자산과 디지털 유산이 혼용되고 있으며, 자산으로 취급할 수 있는 기준조차 모호하다. 둘째, 유언장이나 생전 동의에 기반한 디지털 자산의 이전 체계를 마련해야 하며, 플랫폼과 이용자 사이의 권리 관계를 명확히 해야 한다. 셋째, 유족이 사망자의 디지털 자산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법적 권한을 마련하는 동시에, 개인정보 보호와 악용 방지를 위한 통제 장치도 함께 설계되어야 한다.

디지털 유산은 단지 고인의 흔적이 아닌, 미래 세대가 마주할 새로운 유산의 형태다. 한국 사회도 이제는 ‘디지털의 죽음’에 대해 고민하고, 이를 제도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법률과 문화적 기반을 마련해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