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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유산관리

디지털 유산 관련 법안의 한계와 향후 과제

디지털 유산 관련 법안의 한계와 향후 과제

 

 

1. 디지털 유산 법제화의 현주소 – 국내외 비교와 제도적 미비

디지털 유산은 온라인 공간에서 남겨진 계정, 파일, 콘텐츠, 암호화폐, 구독 정보 등 개인의 디지털 흔적을 의미하며, 최근 들어 상속, 프라이버시, 소유권 문제와 함께 법적 논의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아직까지 디지털 유산에 대해 체계적인 법률이 부족한 상황이다. 대한민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기존의 민법이나 상속법을 통해 디지털 자산을 간접적으로 해석할 뿐, 이를 명확하게 정의하거나 다루는 독립된 법령은 극히 드물다.

미국 일부 주에서는 2015년 제정된 **Revised Uniform Fiduciary Access to Digital Assets Act(RUFADAA)**를 통해 사망자의 디지털 자산을 상속 대상에 포함하고, 신탁관리인에게 접근 권한을 부여하는 법적 기반을 마련했다. 유럽연합 역시 GDPR(일반 개인정보 보호법)을 통해 사망자의 개인정보 처리에 일정 기준을 두고 있으나, 각국 해석에 차이가 크다.
반면, 한국은 디지털 자산에 대한 명확한 입법이 부재하고, 그 결과 유족이 사망자의 계정이나 데이터를 열람하거나 관리하는 데 있어 상당한 제약을 받고 있다.

예를 들어, 유족이 사망자의 이메일, 클라우드, SNS 계정에 접근하고자 해도 대부분의 플랫폼은 ‘개인정보 보호’를 이유로 요청을 거절한다. 이는 결국 법적 공백으로 인해 상속권과 프라이버시 보호 사이의 충돌이 발생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디지털 유산의 제도화는 아직 초기 단계이며, 제도적 기반이 부족해 실효성 있는 상속이나 보호가 현실적으로 어려운 실정이다.


2. 현행 상속법의 적용 한계 – 디지털 자산에 맞지 않는 전통 규범

한국의 상속법은 기본적으로 부동산, 예금, 증권과 같은 물리적 자산 또는 명확한 권리관계를 가진 자산을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다. 그러나 디지털 유산은 비물질적이며, 소유권과 사용권이 불명확한 경우가 많고, 제3자의 서비스 약관에 따라 권리 범위가 제한되기도 한다. 이런 특성은 기존 상속법 체계와 근본적으로 충돌하며, 디지털 자산의 상속 가능성을 애매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SNS 계정이나 이메일 계정은 사용자가 해당 서비스 제공자와 맺은 이용 계약에 근거한 ‘사용 권한’에 가까운 개념이다. 따라서 사망자의 계정 정보는 법적으로 자산으로 간주되지 않으며, 이를 상속 대상으로 인정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일부 플랫폼에서는 계정 공유 자체를 금지하고 있어, 설령 고인이 계정 정보를 가족에게 전달하더라도 법적 효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디지털 자산은 암호화, 2단계 인증, 개인정보보호 강화 등으로 인해 물리적 자산보다 훨씬 높은 보안장벽을 가지고 있다. 상속자는 고인의 사망 사실을 입증하더라도, 비밀번호나 인증 수단 없이는 실질적인 접근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으며, 이는 곧 유산 상속의 실효성을 무력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더불어 디지털 자산의 법적 성격이 불명확하여, 상속세 부과 기준조차 마련되지 않은 경우도 많다. 암호화폐나 NFT와 같이 고유성과 시장 가치를 지닌 자산조차도, 세법상 정확한 평가 기준과 과세 시점이 논란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점은 기존 상속법이 디지털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핵심적인 문제다.


3. 플랫폼 약관 중심의 사후 처리 – 개인 의사보다 기업 규정 우선

현행 디지털 유산의 실제 처리 과정은 대부분 플랫폼 약관과 내부 정책에 의존하고 있다. 즉, 사망자의 디지털 계정이나 자산에 대한 처리는 법률에 기반하기보다는, 서비스 제공 기업의 자율적 규정에 따라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고인의 생전 의사나 유족의 정당한 요구보다 기업의 내부 판단이 우선되는 비정상적인 구조를 야기한다.

대표적인 예로, 구글은 ‘Inactive Account Manager’ 기능을 통해 사용자가 생전에 계정 사후 처리를 설정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페이스북 역시 ‘추모 계정’ 기능을 통해 일부 계정 제어를 유족에게 위임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러나 사용자가 생전에 이 기능을 설정하지 않은 경우, 유족은 구글 또는 메타의 내부 심사와 승인 절차를 거쳐야 하며, 이는 법률과 무관한 기업의 재량에 따라 결정된다.

이와 같은 처리 방식은 개인의 권리를 제도보다 약관에 맡기는 구조를 의미하며, 법적 보호의 공백 상태를 더욱 고착화시킨다. 고인의 명예 보호, 프라이버시 존중, 상속권 확보 등은 모두 공공적 가치임에도 불구하고, 민간 기업의 일방적 정책에 의해 제한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약관들은 대부분 글로벌 기준에 맞춰져 있어, 국내 법 체계와의 불일치 문제도 발생한다. 예를 들어 외국 플랫폼의 계정 처리 기준은 한국의 민법이나 상속법과 충돌할 수 있으며, 국내 사용자나 유족은 사망자의 정보에 접근하는 데 있어 국제적인 법적 장벽까지 마주하게 되는 구조다. 이는 결과적으로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지 못하고, 오히려 디지털 유산의 방치와 유실을 조장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4. 디지털 유산 제도 정비를 위한 향후 과제 – 법률, 교육, 시스템의 통합 필요

디지털 유산을 실질적으로 보호하고 상속 가능한 자산으로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국가적 차원의 제도 정비와 사회 전반의 인식 개선이 필수적이다. 첫 번째 과제로는, 디지털 자산의 법적 정의와 범위를 명확히 규정하는 입법이 시급하다. 이를 통해 디지털 계정, 온라인 지갑, 콘텐츠, 플랫폼 기반 자산 등을 상속 대상으로 명문화하고, 상속 절차와 권한 이전 방식도 법률로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는 디지털 유언장이나 사후 계정 처리에 대한 법적 효력 인정이다. 현재는 개인이 메모나 별도의 문서로 남긴 디지털 유산 목록이 법적 구속력을 갖기 어렵다. 따라서 법률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디지털 유언 시스템과 이를 보조할 인증·공증 절차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 번째는 플랫폼 기업과의 협력 체계 구축이다. 디지털 유산을 둘러싼 기업 약관과 국내 법률의 충돌을 최소화하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글로벌 플랫폼과 사후 처리 기준에 대한 공동 가이드라인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사용자와 유족이 혼란 없이 계정과 자산을 정리할 수 있는 구조를 마련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일반 시민에 대한 인식 교육과 생전 정리 문화의 정착이 필요하다. 디지털 유산은 단지 법률의 문제가 아니라, 생전에 준비하지 않으면 절대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이다. 학교 교육, 공공 캠페인, 의료기관과의 협업 등을 통해, ‘디지털 생전 정리’와 ‘디지털 유언장’ 작성 문화를 활성화해야 한다.